난 이 짤을 보면 국내기관, 국민연금이 아군으로 표시돼 있는 게 항상 눈에 거슬린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원인
명성황후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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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위키피디아 펌 (ko.wikipedia.org/wiki/%EB%8F%99%ED%95%99_%EB%86%8D%EB%AF%BC_%ED%98%81%EB%AA%85#%EC%9D%BC%EB%B3%B8%EA%B5%B0%EC%9D%98_%EA%B0%9C%EC%9E%85)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왕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명성왕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들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체포와 최후
일부 농민군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의 특별 사면 탄원으로 석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공에 눈이 먼 고향 사람의 손에 의해 민씨 정권 인사들에게 넘겨져 대부분 처형당했다.
실패 원인
명성황후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7] 남접과 서포의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끌었다.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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